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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트의 이론에 동조했거나 반대했던 이들은 다양한 이론과 논쟁으로 정신분석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흥미로운 점은 지지자들보다는 반대자들이 학문적 지명도도 높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협력자들과 연구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반대자들(아들러, 스테 겔, 융 등)도 나타났다.  이러한 반대자들로 인해 프로이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프로이트 연구를 수호하고자 '비밀 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지지자들, 비밀위원회

     

    01 어니스트 존스 Ernest Jones, 1879~1958

    존스는 프로이트의 추종자들 중 가장 믿음직하고 돈독했다.  나치즘이 기승을 부려 프로이트가 말년에 오스트리아를 떠날 때도 그를 지켜주었다.  또 동료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도 정신분석이 영향력을 잃지 않도록 헌신적으로 일했다.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난 존스는 의학과 신경학을 공부하다가 1903년 프로이트의 이론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08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첫 번째 정신분석 회의에 참석하여 프로이트를 만났고 자신의 논문을 보여 주었다.  1908년부터 이후 4년 동안 캐나다와 미국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전파했으며, 미국에서는 정신분석과 관련된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런던에 정착해서 여생을 프로이트의 업적을 관리하는 일로 보내며, 프로이트의 전기들 중 가장 뛰어난 하나를 남긴다.  주요 저서로는 『프로이트의 일생과 저작 The Life and Work of Sigmund Freud』(1953~1957), 그의 자서전  『자유 연상 Free Association』(1959)이 있으며, 이외에도 프로이트의 이론은 꾸준히 영어로 번역하였다.

     

    02 샨도르 페렌치 Sandor Ferenczi, 1873~1933

    헝가리 출신의 페렌치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섬세하고 빛나는 품성의 인물이었다. 빈에서 의학 과정을 이수한 후, 왕립 정신과 의사가 되기 전까지는 신경의학자로 활동했다.  부다페스트에 자리 잡은 후 1908년 프로이트를 처음 만나고, 프로이트 연구의 가장 어려운 사례들을 맡았으며, 그의 섬세함과 임상적 직관력, 모험정신이 그 바탕이 되었다.  페렌치의 개인적 특성뿐 아니라 다양한 정신병 환자들 곁에서 연구할 수 있는 환경 덕에 임상 치료 기법을 최대한 분석할 수 있었다. 오토 랭크, 그로 테크와 함께 'active'라고 알려진 치료 기법을 발전시켰으며, 이 기법은 환자와 분석가가 서로 역할을 바꾸어 애정관계를 신체적으로 재현하고, 심지어는 상호 분석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기법으로 인해 프로이트의 미움을 샀고 프로이트의 관심을 다시 받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이론에 대한 견해차로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저서로는 『성인과 아동 사이의 언어 혼란: 부드러움의 언어와 정열의 언어  The Confusion of Tongues Between Adults and Children : The Language of Tenderness and of Passion』(1933)이 있다. 

     

    03 오토 랭크 Otto Rank, 1884~1939

    여러 해 동안 프로이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랑 크는 20세기에 들어서, 페렌치와 함께 추진했던 'active'기법에 더욱 매달림으로써 프로이트와 멀어진다.  프로이트의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연구의 위험성을 알려줬는데도 그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아가 정신적 갈등의 성적인 측면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랭크는 치료 기간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수년간 연구했고, 그 결과 고통의 궁극적 근원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전형적 분석법의 고된 작업보다는 고통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는 간단한 작업으로 신경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즉 프로이트가 강조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보다는 분리라는 충격을 처음 겪게 되는 '출생 후 외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출생 후 외상 The Trauma of Birth』(1924)에 잘 나타나 있다.

     

    04 한스 작스 Hanns Sachs, 1881~1947

    작스는 유대인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1904년 빈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을 읽고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프로이트와 연락하며 진가를 인정받은 그는 빈 정신분석학 회의 '수요일 밤의 토론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작스는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사려 깊은 역할을 했고, 프로이트에게 변함없는 우정과 충성심을 보였다.  프로이트의 그룹과 함께한 인물로서는 처음으로 의학계 출신이 아니었으며, 문학적이며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작스는 랭크와 함께, 응용 정신분석에 초점을 맞춰 발간되던 『이마고 Imago』지의 공동 편집인으로 당대에 영화를 누렸다.  『정신과학을 위한 정신분석의 중요성 The Significance of Psychoanalysis for the Mental Sciences』(1913), 『프로이트: 대가와 친구 Freud: Master and Friend』(1944) 등을 썼다.

     

    05 칼 아브라함 Karl Abraham, 1877~1925

    독일 브레멘 지방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은 의학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스위스에 있는 Burgholzli 정신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가 융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정신분석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병원에서였다.  1907년 프로이트와 처음 만났으며,  이후 프로이트의 가장 믿을만한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가 된다.

    가장 균형 잡힌 초기 정신분석 학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아브라함은 가장 먼저 프로이트에게 융을 조심하라고 조언하여, 이미 융이 프로이트와 갈라설 것을 예견했다.  1910년에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 정신분석학회를 결성했다.

    주요 저서로는『꿈과 신화: 인종 심리학 연구 Dreams and Myths : A Study in Race Psychology』(1909), 『정신 장애의 관점에서 본 리비도 발달에 관한 짧은 연구 Short Study of the Development of the Libido Viewed in the Light of Mental Disorders』(1924)가 있다.

     

    06 막스 아이팅 곤 Max Eitingon, 1881~1943

    아이팅 곤은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취리히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초기 분석가의 한 사람으로, 연구업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정신분석 운동에서 안정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받는다.  아이팅 곤도 Burgholzli 정신병원에서 일을 했고 융에 의해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접한다. 1907년 프로이트를 처음 만나 정신분석가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빈 정신분석학회'에 참여한다.  아이팅 곤은 베를린에서 아브라함을 만나 독일 정신분석의 발전에 함께 공헌한다.  그는 부유했기 때문에 재정 지원과 조직 구성에 뛰어난 역할을 했다.  나치 운동으로 발생한 30년대의 위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가서 예루살렘 '정신분석학회'의 설립에 공헌한다.  『천재, 재능 그리고 정신분석(1912)』, 『신과 아버지 (1914)』, 『낭독 사례(1915)』를 비롯한 30여 개의 논문을 썼으며, 국제 정신분석학회에 열두 개의 보고서를 냈다.

     


     

    프로이트의 반대자들

     

    01 칼 융 Carl Jung, 1875~1961

    융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이다. 프로이트 이론의 대표적 반대자이며, 이후 그가 이끌었던 반대 노선의 활동과 영향력으로 인해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  융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신실한 후원자로 만들고자 했던 프로이트는 융과 이론 차를 줄여보려 했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발달 과정에서 성의 역할을 중요한 것으로 보았지만, 실제로 융은 단 한 번도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동조한 적이 없었다. 1907~1912년 두 사람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견해차는 1912년 융이 프로이트의 의견과 크게 다른 『무의식의 심리학 Wandlungen und Symbole Libido』(1912)을 출판함으로써 심각해졌다.  융의 큰 성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외향성과 내향성 및 사고, 감정, 감각, 직관 등을 가지고 여덟 가지 심리 유형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를 『심리적 유형 Psychologische Typen』(1921)으로 집대성했다.  소년 시절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렬한 꿈을 꾸고 환상도 많이 경험했던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한 이후, 자신의 타고난 비이성적인 측면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동시에 자신의 기묘한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후에 그는 이러한 경험이 정신 영역에서 나온다는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영역을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집단 무의식'이라 불렀다.

     

    02 알프레트 아들러 Alfred Adler, 1870~1937

    프로이트의 이론에 합류한 초기 인물들 중 하나인 아들러는 빈의 젊은 의사로서 '수요일 밤의 토론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내놓지 못하는 추종자들을 경시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프로이트와 친밀하게 지내지 못했다.  이후 프로이트의 제자이기보다는 의심 많고 야심 찬 동료로 남는다.  아들러는 성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열등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위대해졌고, 색약(色弱)은 이따금 대(大) 화가를 만들어 낸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신경증 생성, 가정에서 인간관계, 경쟁을 본질로 하는 현대 문화 등에 관하여 고찰했다.  아들러는 프로이트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후 교육학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신경쇠약의 특성에 관하여 Uber den nervosen Charakter』(1912), 『개인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Praxis und Theorie der Individual psychologie』(1924)가 있다.

     

    03 게오르크 그로 테크 Georg Groddeck, 1866~1934

    그로 테크는 프로이트의 반대자로 알려진 인물들 중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사였던 그의 아이디어에 이끌린 프로이트는 그로 테크를 자신의 그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이론적 노선을 갖고 있었다.  바덴바덴 출신인 그는 1912년 프로이트와 처음 만났는데, 이때 이미 그로 테크는 정신분석과 관련하여 고도로 비판적인 분석을 출한하고 있었다.  몇 년이 흐른 후 , 그는 프로이트를 다시 만나 정신분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이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는다.  프로이트는 그로 테크에게서 '이드 id'개념을 차용하지만 그로 테크가 처음 이 용어를 알려 주었을 때와 달리 상당히 수정을 가한다.  그로 테크에게 이드는 모든 육체적 질병의 원인인, 인간을 통제하는 어떤 알지 못하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정신적인 힘, 즉 모든 충동의 원인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로 테크의 주요 저서는 『질병의 의미 : 정신분석 글 선집 The Meaning of Illness : Selected Psychoanalytic Writings』(1977)이 이으며, 『이드에 관한 책 The Book of the It』(1923)이 있다.

     

    04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 1897~1957

    폴란드의 갈리시아에서 태어난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반대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이다.  빈에서 의학 연구를 하던 중, 일찍이 1920년에 '빈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했으며, 이를 통해 뛰어난 젊은 분석가들과 합류했다.

    라이히의 『성격 분석 Character Analysis』의 첫 부분은 항상 성격 분석의 고전처럼 거론된다. 이 책을 출간함으로써 정신분석을 향해 산뜻하게 출발했으나, 나중에 정신분석과 급격하게 멀어져서 사회 현상과 관련하여 점점 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정신분석을 부정함으로써 분석가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 취급받는다.  라이히는 '성적인 억압'을 '억압'의 문제로 보았다.  사회적 억압은 정신 내부의 억압 기능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성적 자유와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05 빌헬름 스테 겔 Wilhelm Stekel, 1868~1940

    폴란드 태생의 스테 겔이 분석을 위해 프로이트와 처음 만난 것은 1902년이었다.  이후 그는 아들러를 만나 '수요일 밤의 토론회'에 참여한다.  바이마르 학술대회 이후 아들러와 함께 기관지 『정신분석 중앙신문』을 창립하고 그 방향을 정했다.

    프로이트는 편지에서 그를 괴롭히는 무능한 두 추종자(아들러와 스테 겔)에 관해 언급했다.  아들러가 프로이트와 전격적으로 갈라선 것에 비하면 스테 겔은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후 그는 프로이트와 다시 합류하고자 했지만 프로이트는 오래된 견해차를 되돌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스테 겔은 더욱 적극적으로 짤막한 분석 기법을 치료의 일부로 사용했다.  주요 저서로는 『자기 성애: 자위와 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연구 Auto-erotism : A Psychiatric Study of Onanism and Neurosis』(1961)가 있으며, 『빌헬름 스테 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Wilhelm Stekel』(1950)이 있다.

     

    06 프리츠 위텔즈 Fritz Wittels, 1880~1950

    위텔스는 1905년부터 프로이트의 강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봄에 그의 삼촌이 프로이트의 모임에 그를 소개했다.  1910년 '빈 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했는데, 이는 자신의 책 『이방인 에스겔 Ezechiel der Zugereiste』(1910)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와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책 때문에 정신분석이 불리한 논쟁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만일 그 책을 출간한다면 우리 모임에 참여할 필요가 없소."  위텔스는 1924년에 프로이트의 전기를 출간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기 『지그문트 프로이트:그의 인간성, 가르침, 학문  Sigmund Freud : his personality, his teaching, his school』(1924)은 프로이트에게 혹평을 들었지만, 그는 기를 쓰고 1925년에 '빈 정신분석학회'로 되돌아왔고, 2년 뒤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  프로이트와 화해한 후, 그는 1932년에 프로이트 전기를 일부 수정하였다.  이 외에도 회고록 『프로이트와 어린아이 여자 Freud and the Child Woman』(1995), 『미국 여성의 성 습관 The Sex Habits of the American Women』(1951)을 저술했다.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점 (비판)

    ▶성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 : 모든 인간을 근친상간적 욕구 등 성적 자극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로 보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문화적 편견과 성적 편견이 있는 것으로 지적

    • 프로이트는 결국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비판받았다.
    •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여성이 남근 선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초자아의 발달이 남성보다 부족하다는 것은 남성 지배적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은 탓이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여권주의자들의 강한 반론을 받게 된다.

    ▶과학성에 대한 비판 : 정신병리를 가진 성인들의 기억이나 환상, 혹은 꿈을 통해 보편적인 아동 발달 이론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이는 단지 개인적 견해일 뿐 과학적 이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론의 일반화가 어렵다는 것)

     

    ▶발달에 미치는 생물학적 요인의 강조로 대인관계적,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고려하지 못하였다.

     

    ▶프로이트의 인간관은 매우 비관적이어서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 속의 본능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였다.


     

    사회복지 실천에 끼친 영향

    ▶긍정적 영향

    • 개인의 과거 경험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진단주의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 문제에는 일정한 원인이 있다는 직선적 원인론 (linear cauality)을 채택함으로써 사회복지 실천이론의 과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부정적 영향

    • 인간의 정신 내적 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 인간관과 이에 따른 실천을 조장함으로써 사회복지조직의 분열과 사회복지 실천상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출처 

    정신분석 입문, 2011, 최석진 편역, 돋을새김

    사회복지 통합 이론서, 2021, 김진원 편저, 가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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